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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칼럼] 유령이 된 블랙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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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9 04:55:05 크게보기 작게보기 프린트 이메일 보내기 목록
 
 
 
‘블랙리스트’의 시작은 살생부였다. 영국 왕 찰스 2세가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정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청교도 혁명이 계기였다. 정권을 잡은 의회파는 1649년 1월 당시 국왕 찰스 1세를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키고, 대법원도 구성했다.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재판 시작 1주일 만에 찰스 1세는 사형을 언도받았고 사흘 후 참수됐다. 아들 찰스 2세는 19세 때 이를 지켜봤다. 재판 시작 열흘 만에 참수당한 아버지를 보며 칼을 갈았을 것이다. 왕당파가 복귀한 1660년 찰스 2세에게 기회가 왔다. 이때 ‘블랙리스트’가 등장한다. 아버지에게 사형을 언도했던 판사와 조력자 58명의 이름이 든 명부였다. 13명은 국왕 살해 혐의로 처형됐고, 25명은 종신형에 처해졌다. 나머지는 달아났다. 처음 등장한 블랙리스트는 피를 불렀다.

살생부 블랙리스트의 시대는 갔다. 누구를 죽이고 살리는 유의 블랙리스트는 문명국이라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정권이 이념적으로 기피하는 인물을 담은 리스트는 여전히 존재한다. 범위를 산업체 등으로 넓히면 수도 없다.

특검이 수사 중인 ‘문화계 블랙리스트’도 그중 하나다. 2014~15년 사이에 작성된 반정부 성향의 문화계 인사 9천473명의 이름을 담았다는 리스트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유령이다. 보았다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만들었다는 사람이 없다. 특검이 당사자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김기춘`조윤선으로 이어지는 얼개를 맞춰 가고 있다. 정점에 박근혜 대통령이 어른거리지는 않는지 의심한다. 이 블랙리스트 역시 살생부와는 거리가 멀다. 정부가 반정부 성향의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재정 지원이나 인선 배제를 위해 만들었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미국은 70년 전 비슷한 경험을 했다. 1940년대 미국은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좌우 이념 대결이 극심했다. 좌파 성향의 극작가, 감독, 배우의 활동을 막기 위해 ‘할리우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좌파 색출에 정부를 대신해 미 하원 비미활동위원회(HUAC)가 나섰다. 좌파로 의심되는 문화계 인물들을 의회로 불러 신념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상당수는 의회에 출석해 해명했지만, 일부는 거부했다. 거부한 이들은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대표적 인물이 달튼 트럼보 등으로 대표되는 ‘할리우드의 십인’이었다. 이들은 신념을 밝히기는커녕 의회에 나와 HUAC가 심문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느냐고 따졌다. 미 헌법은 사상,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

HUAC가 ‘할리우드의 십인’을 국회모독죄로 고소했을 때 이들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내세웠다. 연방대법원이 헌법에 근거해 자신들을 지지해 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연방대법원은 이들에게 각각 1천달러(2016년 환산 1만700달러)씩 벌금을 매기고 6월~1년의 징역에 처했다. 정부를 비난하는 이들의 표현의 자유보다 이들로 인해 침해되는 시민의 표현의 자유 희생이 더 크다는 이유였다.

요즘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들이 좌파라는 근거는 없다.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를 촉구하는 서명자와 시국 선언한 문학인,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을 한 문화인, 그리고 박원순 후보 지지 선언을 한 문화인 등 모두 9천473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정부가 자신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예산 지원에서 배제함으로써 헌법 제22조가 보장하고 있는 예술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이 좌파라는 근거가 없는 것처럼 예술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는 근거 또한 마땅찮다. 우리나라처럼 대통령을, 또는 정부를 드러내놓고 욕할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이들이 침해당한 것은 ‘예술의 자유’가 아닌 ‘돈’으로 보인다. 정부 예산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정부의 간섭을 받을 일 없으니 오히려 예술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된다. ‘돈’으로 예술을 옥죄기 위해 만들어진 블랙리스트라면 스스로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당당해 보인다. 철 지난 블랙리스트를 붙들고 욕할 때가 아니다.

정창룡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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